은유로서의 병

 * "은유로서의 질병" 저자 수전 손택은 미국 최고의 에세이 작가이자 소설가, 예술 평론가이다.이 책에서 그는 결핵, 암, 에이즈가 가진 은유가 어떻게 대중 사이에서 정착했는지를 톨스토이, 스티븐슨, 드뷔시 등의 예술작품에서 예를 들어 독자들에게 쉽게 설명하고 있다.

* 이 책의 내용을 간략하게 보면 … 18세기에 '결핵'은 낭만주의의 영향으로 사랑의 병으로 인식되고 있었다. 당시 숱한 문학작품 속 비련의 주인공이 결핵환자로 설정되기도 했다. 주로 가냘픈 여주인공들이 흰 손수건에 검붉은 피를 토하고 쓰러졌기 때문에 독자들의 마음 한구석에서 아름다운 이미지로 인식되고 있었다. 그 시대의 작가들은 결핵을 우아한 죽음과 박제되는 젊음의 상징으로 표현했다. 천재 예술가들의 주된 사망 원인이었다고 해서 천재병으로 불리기도 했다.19세기 의사와 언론이 침략 전쟁 정복 등 군사적 언어로 암을 인류의 적으로 규정했다고 설명한다.2장 에이즈와 그 은유에서는 많은 정치인과 문화가 에이즈를 도덕적 타락에 대한 천벌의 은유로 씌웠다고 설명한다.

*이 책을 통해 수전 손택이 우리를 이해시키려 한 것은 무엇이었을까.병은 병이고 치료해야 할 무엇일 뿐이라고 어원학적으로 보면 환자는 고통받는 사람을 뜻한다. 그러나 환자가 가장 깊이 두려워하는 것은 이런 의미의 고통 그 자체가 아니라 사람들이 자신의 고통을 비하하는 고통이다.나는 아픈 나머지 공포에 질린 사람들을 설득해 이렇게 말하고 싶었다. 질병은 질병일 뿐이다, 질병은 저주도 아니고 신의 심판도 아니며, 당황할 필요가 없다,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지 말라.' - 본문에서

그는 병을 낙인찍을 뿐 아니라 더 많은 질병에 시달리는 사람들을 낙인찍게 하는 병에 대한 은유를 비판했다. 질병 자체, 그리고 질병에 달라붙어 환자의 재활 의지를 꺾는 낙인인 은유, 이미지와의 투쟁을 선언한 것이다. 병을 신비화하는 모든 언어를 몰아내고 투명성(Transparency)을 찾으려는 노력. 그리고 그런 은유와 이미지를 양산한 사회를 향한 준엄한 비판을 하고 있다. 병을 신비화하는 언어를 몰아내고, 우리가 병, 나아가 삶과 제대로 마주해야 한다는 것이다.

* 우리가 만드는 병에 대한 은유, 과연 과거만의 이야기일까?수전 손택의 은유로서의 질병은 시간을 훌쩍 뛰어넘어 지금 2021년 코로나 19에 거듭된 은유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하게 만든다.'코로나 19에 씌워진 은유'... 이 문제에 대한 문화평론가 손희정 씨의 글을 소개한다.

[지금 여기] 은유에 반대한다출처 : 경향신문 오피니언 2020.5.10 손희정 문화평론가

내 마음은 호수니 노를 저어라. 갑자기 시를 지은 것은 그렇다, 은유에 대한 이야기 때문이다. 이것이야말로 은유의 대표적 예문이 아닌가. 은유란 시간만큼 낡은 정신작용이며 과학적 지식과 표현력을 포함해 각종 이해방식을 만들어내는 기초(수전 손택)다. 은유가 없었다면 인간의 상상력은 물론 이해력도 그만큼 제한됐을 것이다.반면 은유는 익숙한 것을 통해 낯선 것을 설명한다는 점에서 편견을 재생산하거나 오해를 낳기도 한다. 지금까지 경험하지 못한 일인 코로나19와 함께 난무하는 은유가 우려되는 이유다. 낯선 것을 이해하는 새로운 관점을 찾지 못하면 틀린 답 속에서 헤매기 쉽다.처음 관습적 은유는 위험하다고 생각한 것은 바이러스 공격 이것은 전쟁 같은 표현을 보고 나서였다. 과연 우리는 바이러스와 전쟁을 하고 있는 것일까? 다만 자연에 존재하는 물질인 서스콥2(코로나19)를 부추겨 팬데믹(세계적 대유행)을 초래한 것은 인간이 아닌가.보건복지 전문가 리함버는 질병을 바이러스와 면역력 사이의, 그리고 바이러스의 진화와 인간의 백신 생산능력 간의 전투로 생각하는 태도는 제약사들이 좋아할 것이라고 말했다. 심지어 제약회사는 이윤이 보장되지 않으면 백신을 개발하지 않는다.이어 31번 확정자가 등장했다. 스스로 재생산하지 않고 어딘가에 잠입해 기생해 콩나물을 먹고 다른 곳으로 이동하는 사이비. 신천지와 바이러스 사이에 존재하는 이미지의 동형성이 신천지에 대한 이단 공격을 더욱 쉽게 만들었다. 바이러스는 「베는 사람」을 설명하는 은유적의 거점이 되었다. 이들의 부정적 이미지 사이에서 일어난 상호작용의 안무는 강력한 낙인으로 이어졌다. 신천지는 바이러스로, 감염자는 신천지 신도다 최근에는 게임은 코로나 시대의 미래식이라는 말이 나오고 있다. 대표적인 콘택트 산업으로 게임을 육성하겠다는 정세균 총리였다. "과감한 규제 혁신으로 누구나 도전할 수 있는 생태계를 만들고 싶다"고 말했다. 재해를 계기로 규제를 푸는 자본중심적 정책에 먹거리와 생태계의 은유는 적절치 않다.21세기의 전염병은 인간의 식량 생산 방식이 빚은 결과다. 전문가들은 특히 공장식 축산과 야생동물을 먹는 식문화, 그리고 코로나19의 관계를 지적한다. 돼지 가금류 등 목장이 원시림으로 확장되면서 야생동물 포획자들이 더 깊은 숲으로 들어가 신종 병원체와의 접촉 폭이 넓어지고 있다는 것이다.먹을거리에 대한 탐욕이 팬데믹을 불러왔고 이것이 다시 식량위기로 이어지고 있다. 심지어 코로나19에 따른 농가 피해 대책과 농산물 가격 보장을 요구하는 농민들의 목소리는 뒷전인 채 게임 음식 운운이라니. 4차 산업혁명이 위대하다고 해도 게임을 먹을거리로 만들 수는 없다.그리고 용인 66번 확정자와 함께 또 다른 칼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그가 방문한 곳이 주로 성적 소수자가 찾는 클럽이라는 점이 타깃이 됐다. 한 언론은 기다렸다는 듯 기뻐했다. 동성애를 계속 공격해 온 동지는 HIV·AIDS를 이용해 온 것처럼 코로나19도 도구로 삼는다. 이들은 낯익은 오염 이미지와 낡은 가짜 뉴스를 활용하면서 동성애와 바이러스를 연결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그러나 질병관리본부가 강조하듯 코로나 19 환자는 환자일 뿐이라고 말했다. 질본은 질병에서 이야기, 이미지, 그리고 낙인으로 이어지는 은유의 습관을 없애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낙인은 방역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X를 Y라고 하지 말라. 은유로서의 질병을 쓴 수전 손택의 말이다. 코로나 열아홉을 다른 아무것도 아닌 인재 그 자체로 보고 제대로 해결하기 위해 편견으로 낳은 은유는 잠시 접어두는 게 어떨까.


*코로나19라는 병에 대해 나, 그리고 지금 우리가 씌우고 있는 은유는 무엇일까?

코로나19의 가장 큰 특징은 강력한 전염성이다. 나만의 피해가 아니라 방심하면 내 가족, 주변 사람에게 끼치는 피해가 막대하다. 그래서 우리는 이 코로나의 방역문제에 대해 각 개인의 '책임감'을 강조하게 된다.따라서 병이 확정된 사람에게는 책임감의 상대어인 무책임이라는 은유를 사용하게 되는 것이다.요전에 직장 동료를 만났다. 그 친구는 인도네시아로 입양된 후 격리 중이라고 말했는데, 그때 그 소식을 전해들은 그 자리에 동석했던 친구의 반응은 친구 사위의 병세에 대한 걱정을 나타내기 전에, "왜?조심 좀 하지 않을래? 라고. 아기도 있는데~ 지금 생각하면 부끄럽지만 ^^;;친구 사위의 부주의를 질책하는 반응이 먼저였다.수전 손택의 '은유로서의 병'을 읽은 후 나는 이것이 내가 이 병에 가져온 무책임한 은유의 습관이었음을 생각하게 되었다.


[송평인 칼럼] 우유로서의 병 '우한 폐렴' 중에...출처 : 동아일보 2020. 2. 12

우한 폐렴 사태를 두고 프랑스의 한 신문은 Alerte jaune(황색 경보)라고 칭했다. 서양에서 황화론이 다시 고개를 들고 있다. 죄와 벌의 마지막 부분에서 주인공 라스콜리니코프는 전 세계가 아시아에서 유럽으로 퍼져나가는 어떤 무서운 역병에 희생될 운명에 처하는 꿈을 꾼다. 그가 염두에 둔 것은 콜레라였다. 에이즈 때는 아프리카 기원을 문제 삼아 흑화론이 일었다. 황화론이나 흑화론은 서양인의 나쁜 버릇과 같다.

서양인의 눈에는 한국인 일본인 중국인이 모두 비슷하다. 한국인과 일본인은 묘한 처지에 빠져 있다. 이들은 중국인처럼 바이러스 숙주 취급을 받는 것에 기분이 상하면서도 그들 스스로가 또 중국인을 바이러스 숙주 취급하는 모순에 빠져 있다.

위에 제시한 사설은 지난해 쓴 것이다. 그런데 지금 미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아시아인에 대한 혐오 테러 현상을 보면서 코로나19에 가해진 이 무서운 은유와 이미지의 중첩에 소름이 끼친다.물론 여기에는 미국 내 정치, 경제적 상황에 대한 불만 표출, 그리고 중국의 잘못된 대처방식에 대한 불만 등 여러 요인이 있을 것이다.하지만 이건 너무 심해 억울하다. 그러면서도 이 같은 송평인 논설위원의 글처럼 중국인처럼 바이러스 숙주 취급을 받는 것을 기분 나쁘게 보면서도 우리 스스로가 또 중국인을 바이러스 숙주 취급하는 모순에 빠져 있는 게 아닌가 반성하기도 한다.

지금 이 시기에 수전 손택이 다시 살아와서 이 모습을 본다면 과연 뭐라고 질책할 것인가.

병은 병이고 치료해야 할 무엇일 뿐이야 이 사람들~~~~~"

"병은 병이야!" 질병은 저주도 아니고, 신의 심판도 아니며, 당황할 필요가 없다고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지 말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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